출처 : 야후! 심리웹진 구냥( http://kr.ring.yahoo.com/WEBZINE/main.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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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너스로 위에 소개된 정약용이란 분을 소개합니다.

정약용(1762~1836. 호는 다산(茶山).)


사실들
남인의 가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천재적인 지적 능력을 발휘함. 4살 때 천자문을 깨쳤고, 7살 때 원근법을 소재로 한 시를 지음: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 / 가깝고 먼 곳이 같지 않네.” 그림에도 소질을 보였을 정도로 다재 다능했음.

조선 실학의 대부인 이익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음. 이익은 남인을 비롯한 조선 모든 실학자의 정신적 지주로 평생 벼슬을 하지 않으며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사도세자의 변이 일어나고 정조가 즉위한 어수선한 정국에 중앙 관직에 진출. 사도세자의 친자인 정조가 즉위했음에도 당시 조정은 여전히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간 노론이 정권을 쥐고 있었음. 정조는 정약용의 천재성을 일찍이 간파해 남인이었던 그를 학문적인 오른팔로 삼았음. 이때부터 정약용에 대한 노론 정권의 경계가 극에 달하기 시작.

임기응변 및 처세술이 남달랐음. 조정에서 자신의 소신에 어긋나지 않는 말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비위를 상하게 하지 않았고, 완벽한 논리와 변론으로 음해 받을 가능성을 최소화 했음. 이런 처세술은 그가 남인이라는 정치 태생적 한계와 천주교를 믿었다는 치명적인 약점에 불구하고 끝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해 줌.

1789년 화성(현재의 수원성)을 정조의 명을 받아 설계하기 시작. 현재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화성은 조선의 전통적인 축성법을 바탕으로 중국의 성제와 서양의 과학기술을 집대성해 지은 18세기 건축문화의 정수였음. (성 축조를 위해 기중기와 활자-도르래 등을 발명하기도 함.) 뿐만 아니라 정약용은 성을 건조하는데 드는 인력에 일정한 품삯을 제공해 현대적인 성과급 방식의 노동시장을 만들었으며, 계획적으로 개간된 농업시설 및 최초의 현대적인 상업지구를 기획, 성안에 기거하는 백성들이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이상 도시를 건설하였다.

정약용이 직접 설계하고 이용한 거중기. 정약용은 서학으로부터 기계학과 물리학을 이용, 실제 엄청난 무게의 돌을 들어올릴 수 있는 도르레를 만들어 냈다. 이 기계로 4만냥의 돈을 절약하는 효과를 거둠.

1799년 [전론]을 집필, 농업의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극소수의 지주들이 땅을 소유하고 그곳에서 농사 짓는 소작농들을 착취하는 시스템에서 벗어나, 국가가 농민들에게 직접 땅을 배분하고 능력에 따라 소득분배에 차등을 두는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한 것이 골자. 정약용은 이후에도 능력에 따라 이윤을 분배하는 자본주의적 시스템 도입을 여러 차례 주장함.

1794년 경기도 지역 암행어사로 임명돼 탐관오리의 패악을 남김없이 고발함. 그러나 이런 강직한 관직 활동은 노론 집권층의 원한을 사 후에 보복을 당하는 원인이 됨.

곡산의 목민관으로 부임했을 때, 세금 소요 사태를 일으킨 피폐한 농민들을 너그러이 돌려보내는 등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이 차별 받지 않도록 혁신적인 법 집행을 했을 뿐 아니라, 후대의 목민관이 이런 관행을 이어갈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까지 마련함. 정약용은 이후에도 정종의 신임을 받아 관리들의 부정을 감찰하고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해결해 주는 역할을 수행함.

정종가 승하한 후, 조선은 다시 학문, 문화, 경제, 정치적 암흑기로 빠져 듦. 정약용은 이때 자신의 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 지었음. 노자의 "망설이면서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 같이 주저하면서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자신을 지켜줄 주군이 없는 세상에 극도의 불안감을 표현함.

정조의 사후 노론 세력은 조정에서 남인 관료들을 뿌리 뽑기 위해 천주교를 악용함. 당시 재능 있는 남인들은 대부분 천주교 신자거나 천주교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었음. 노론의 잔혹한 탄압으로 조정의 남인들은 거의 전멸했고 정약용과 그의 주변인들도 차례로 제거됨. 정약용은 작은 형 정약종과 조카 사위 황사영이 천주교를 버리지 않은 죄로 모진 국문을 당하고 18년간 귀양을 가게 됨. (정약종과 황사영은 사형을 당했으나, 정약용은 과거 곡산 목민관 당시의 선행으로 죽음을 면하게 됨.)

귀양지인 전라도 강진에서 정약용은 실학문을 집대성하고 부국과 민생 안정을 위한 책을 냄. 귀양지에서 극도의 가난과 외로움, 마을 사람들의 천대를 불굴의 의지로 이겨내며 학문과 저술에 몰두, 아방강역고, 경세유표, 목민심서 등 수많은 저서를 집필함.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뒤 흠흠신서를 저술.

귀양지에서 아들들에게 편지를 보내 학문적 조언과 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쳤고, 이는 두 아들이 훌륭한 학자로 자라나는데 큰 도움이 됨.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자식 뿐이라는 생각에 편지에는 지나칠 정도로 엄하고 강압적인 내용이 많았음. 이들 편지에 드러난 정약용의 조급증과 아집, 몇몇 비상식적인 주장들은 정약용의 인간적인 면을 돌아보게 해줌.

정조시대 등용됐던 개혁 성향 관료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정약용이었음. 노론 세력은 정약용을 개혁파의 수장으로 여겨 그를 끝내 처단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했음. 귀양에서 풀린 뒤에도 정약용을 제거하려는 노론 세력의 수 차례 모함과 모략이 있었으나 모두 무위에 그침.

1836년 노환으로 별세.


어록
"우리나라 사람들은 걸핏하면 중국의 사실을 인용하는데 이 역시 비루한 일이다. 아무쪼록 삼국사기, 고려사 연려실기술과 동방의 다른 문자와 사실을 수집하고 그 지방을 고찰한 뒤에 시에 인용해야 후세에 전할 수 있는 좋은 시가 나올 것이며 세상에 명성을 떨칠 수 있다."

"임금의 정치가 퇴폐하면 백성이 곤궁하게 되는데, 그러면 나라가 가난하게 된다. 나라가 가난하면 부세의 징수가 가혹하게 되는데, 그러면 인심이 떠나가고 그러면 천명이 가버리게 되니 그런 까닭으로 시급한 것은 정치에 있다."

"너는 어째서 아비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느냐. 하물며 네가 아비의 책을 베끼고 읽지 않는데 누가 나의 책을 베끼고 읽겠느냐. 네가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폐족인 우리 가문을 누가 기억하겠느냐? 내 책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이 단지 사헌부의 계문과 옥안만 믿고 나를 평가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되면 나는 어떤 사람으로 취급 받겠느냐?"

- 귀양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

역시 다음편에서....^^
Posted by Young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