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야후! 심리웹진 구냥( http://kr.ring.yahoo.com/WEBZINE/main.html )

이런...처참한.....

나..평생 혼자 살아야 하는건가...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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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Young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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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1 종료후, 드디어 다시 연재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심심하다면 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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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늘상 2인자들을 선망해왔습니다. 그 이유는 잘 표현할수는 없지만, 2인자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1인자를 서포터 해주는 그 역할에 대한 매력이랄까요, 그런 매력을 알게 모르게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는 다 핑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서지 못하는 성격을 둘러대기 위한 핑계....

아무튼.. 저의 결과는 이렇게 나왔답니다..... 흐음...흐음...근데 어찌보니 다들 독재자들....이군요;;; ㅜㅜ

Posted by Young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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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나왔다!!!! 까웃~

이번엔 두번 테스트를 했습니다.... 왠지 첫번째 테스트는 내가 아닌듯 해서;;;;; 이 두번째 테스트가 맞는거 같네여;;;;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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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창 빠져있는 심리웹진 구냥;;;의 7번째 주제가 발표되었습니다... 이름하여 내가 정치를 한다면???

후후;;;; 왠지.. 이번에도.. 비슷할듯한 느낌이...드는건;;;;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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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Young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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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맞는 이야기도 있고.. 아닌 이야기도 있는거 같습니다...

가끔씩.. 제 3차 대전이 일어나게 된다면에 대해서 상상을 하곤 하는데;; 그때 저는 분명 각성해서 영웅이 된다는 상상에 빠지곤 했습니다...

물론.. 상상이니까.. 저지랄했는데;;; 실은.. 저도 아래의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ㅜㅜ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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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Young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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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좀 일찍 테스트가 올라온거 같습니다..

이 테스트를 하실때에 주의하실점은..

항상.. 로그인을 하고 테스트를 하시라는;;;

안그러면 부정확하답니다...

아무튼.. 개인적으로 스티브 잡스가 나와서...좋네여..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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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Young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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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알게된 사이트라서.....그냥 즐기고 있는중입니다....

이번 주제는... 당신이 연애에 실패하는 이유는????

딱!!!! 저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죠.... .예전 아는 누나가 저보고 했던....말씀....

넌...너무 실속이 없다...... -0-;;;;

옆에 곰돌이 보고...... "딱! 내이야기네~~" 바로 공감했다는....

여러분....

제발 사랑을 주셈;;;;;;o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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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Young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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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테스트를 해보세요...

참고로... 제 결과는;;(클릭해서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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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너스로 위에 소개된 여성분들을 소개합니다.

에이다 백작부인(Ada Augusta King, Lady Lovelace. 1815-1851.)

요약
영국의 대문호 로드 바이런의 친딸. 유명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백작부인이 된 상류층 여성으로, 수학에 천재적 재능을 갖고 있었음. 스스로 컴퓨터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 에이다는 자신보다 먼저 컴퓨터 개발을 시작한 찰스 배비지를 도와 실제 컴퓨터 제작을 주도했으며, 컴퓨터와 프로그래밍 이론에 대한 (수백 년이나 앞선)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시대를 앞서간 이 천재 여성은 그러나 "반항적 기질"을 잠재우기 위해 아편을 강제 복용했으며, 말년에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는 등 적지 않은 고초를 겪음.


사실들
1815년 오거스타 에이다 바이런(Augusta Ada Byron)이란 이름으로 태어남. 그녀의 처녀 성(maiden name)은 바이런으로, 영국이 낳은 유명한 낭만주의 시인인 바이런(Lord Byron)의 친딸이었음.

에이다의 어머니는 바이런과 합법적인 혼인 관계를 맺은 유일한(최소한 영국에서는) 여성이었음. 그러나 바이런과의 결혼은 그녀에게 금전적, 정신적 고통만 안겨준 채 1년 만에 끝나고 맘.

대문호였던 아버지와 수학에 조예깊던 어머니의 지적 혈통을 물려받은 에이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방탕한" 기질은 이후 그녀를 곤경에 몰아넣음.

어릴 때부터 모든 학문에 천재적 재능을 발휘, 주변으로부터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천재 소녀로 유명해 짐.

우연히 어머니의 친구를 통해 불세출의 발명가인 찰스 배비지를 만나게 됨. 찰스 배비지가 만든 원시적인 컴퓨터 형태인 "미분기"는 에이다에게 굉장한 영감을 심어줌. 에이다는 베비지가 발명한 미분기가 지금까지의 기계적 계산기와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떤 일들을 할 수 있는지 한눈에 알아봄.

이후 에이다는 배비지와 연락을 주고 받으며 미분기에 대한 의견을 나눔. 배비지는 에이다의 수학적 통찰력에 탄복, 다음과 같은 글을 남김. "이 여성은 내가 발명한 기계에 대해 오히려 나보다 더 잘 이해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 기계를 설명하는데 있어 이 여성은 나보다 몇 배는 더 탁월했다."

당시 배비지의 발명품의 가능성을 이해했던 유일한 사람은 에이다였음. 천재적 수학 능력을 타고난 이 여성은 평생 배비지의 후원자로서, 그의 발명품을 세상을 알리고, 개발 자금을 모으며, 동시에 직접 개발에 관여함.

19살에 킹 러브레이스 백작(Lord King, Baron of Lovelace)과 결혼해 "에이다 오거스타 킹, 러브레이스 백작부인(Ada Augusta King, Lady Lovelace)"이라는 호칭을 얻음.

1842년 오늘날 컴퓨터의 원형이 된 "해석기관"에 관한 책, "배비지의 해석기관에 대한 분석(Observations on Mr. Babbage"s Analytical Engine)"을 출간. 이때 에이다가 작성한 배비지 해석기관에 대한 설명은 현대 컴퓨터 프로그래밍 역사의 기원이 됨.

이 책에서 해석기관에 대한 설명, 해석기관이 완성돼야 하는 이유, 그리고 해석기관이 보여 줄 수 있는 여러 놀라운 기능에 대해 정확하게 기술. 특히, 100년이나 앞서 현대 프로그래밍의 기초적인 개념을 모두 만들어냄.

이때 고안된 것이, 서브루틴(subroutine), 루프(loop), 점프(jump)와 같은 프로그래밍 트릭들이었음. 뿐만 아니라 계산 과정에서 어떤 특정 조건이 들어맞을 경우, 현재 공식에서 지정된 다음 공식으로 넘어가는 "if" 구문을 고안함. "If" 구문의 개발은 기계가 단순히 계산만 하는 것을 뛰어 넘어, 주어진 조건에 따라 "결정"을 내리고 "논리"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음.

이런 프로그래밍의 기초를 가장 먼저 고안하고 발전시킨 사람이 바로 에이다였고, 그녀가 남긴 기록은 이후 현대 프로그래밍의 시초가 됨.

흥미롭게도 이 책에서 인공지능의 가능성까지 기술함. "if" 구문에 의해 기계가 논리를 수행할 수 있다면 언젠가는 인간처럼 지능을 갖출 수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이었음. (시대를 100년이나 앞선 에이다의 경이적인 통찰은 앨런 튜링에 의해서 재발견됨.)

언제부터인지 에이다는 극심한 도박 중독증에 시달리기 시작. 나중에는 남편 집안의 패물을 훔쳐 도박 자금을 마련하는 수준으로 발전함. 남편의 패물까지 저당 잡히고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리던 에이다는 친정 집으로부터 돈을 빌려야 할 절박한 상황까지 몰림. 도박으로 인한 경제적, 정신적 어려움에 시달리던 에이다는 설상가상으로 자궁암까지 걸려 결국 36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함.

에이다의 업적은 그로부터 100년 뒤, 1950년대가 되서야 세상에 알려짐. 이후 에이다에겐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라는 호칭과 함께, 1979년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ADA" 프로그래밍 언어가 탄생함.


헤디 라마(Hedy Lamarr. 1914∼2000)


요약
"삼손과 데릴라"의 여주인공으로도 유명한 CDMA 기술의 어머니. 20세기 초 헐리웃에서 가장 유명했던, 또 가장 아름다웠던 여배우. 그녀의 화려한 배우 경력에 가려 과학자와 발명가로서의 위대한 업적은 오늘날에도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음. 그녀는 세계 2차 대전 당시 잠수함의 어뢰를 통제할 수 있는 무선 전파 기술을 발명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CDMA 무선 기술의 모태가 됨. CDMA는 오늘날 상업용 무선 기술의 핵심 중 하나가 되었음에도, 라마는 평생 보상이나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쓸쓸한 말년을 보냄.


사실들

오스트리아 출신, 1933년 "엑스터시(Ecstacy)"라는 영화에 출연해 세계적 배우로 발돋움함. "엑스터시"는 여배우가 전신 누드로 출연한 세계 최초의 영화였음.

1937년 헐리웃으로 진출. "Come Live With Me" "삼손과 데릴라(Samson and Delilah)" 등 25편에 달하는 영화에 출연하면서 1930-40년대 "헐리웃 최고의 섹스 심볼" "헐리웃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 등의 호칭을 얻게 됨.

1940년 세계 2차 대전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할 무렵 전위 예술가이자 발명가였던 조지 앤사일(George Antheil)과 함께 잠수함의 어뢰를 통제할 수 있는 무선 전파 기술을 발명함. 이 기술은 무작위의 전파 패턴을 이용해 여러 단위의 라디오 주파수를 쏘아 보낼 수 있는 혁신적 발명이었음.

헤디 라마와 앤사일은 이 기술을 단순히 실험용이 아닌, 나치의 잠수함에 대항해 실전에 응용할 수 있는 단계로까지 발전시킴. 하지만 이 기술을 받아 든 미국 해군은 이들의 기술이 구조적으로 현실성이 없다며 이용을 거부함.

“주파수 도약(frequency-hopping)”이라는 명칭으로 업계에 소개된 이 무선 기술은 후에 “주파수 도약 확산 대역(frequency-hopping spread-spectrum)”, FHSS라는 무선 기술로 발전함. FHSS의 코드화 된 전파의 조합 수는 수십 조가 넘기 때문에 보안상으로 지극히 안전했으나 그런 기술의 우수성에 불구하고 FHSS는 향후 10여년 간 사장됨.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발했을 때 무선 통신 보안이 절실했던 미군은 FHSS 기술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FHSS 기술은 마침내 미국 정부의 보안 통신 수단으로 이용됨. 그 뒤로 이 기술을 무선 통신에 도입한 미군 측은 이 확산 대역 기반의 무선 기술을 1980년 중반 일반에 공개했고, 이 기술은 오늘날 CDMA로 발전함.

CDMA 기술의 기본 원리를 발명한 라마의 공적은 1997년이 되서야 세상에 알려짐. 그 해 라마는 미국과 모국인 오스트리아로부터 여러 과학기술 관련 상을 받음.

라마는 자신이 발명한 기술 특허로부터 아무 이득도 얻지 못했으며(라마의 특허권은 1959년 종료됐음), 상을 받은 3년 후인 2000년 마이애미에서 쓸쓸히 혼자 숨을 거둠.


제인 오스틴(Jane Austen. 1775-1817.)


요약
"오만과 편견," "에마," "센스 & 센서빌러티" 등을 쓴 영국이 자랑하는 여류 소설가. 18-19세기에 활동했던 모든 여류 소설가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사람이었음. 스스로를 매우 지적인 여성으로 생각했으며, 주로 지적인 사람들과 (지적 발전이 없는) 우둔한 사람들을 잘 대비시켜 소설의 긴장감을 극대화 했음. 평생 결혼하지 않고 가족과 함께 살았지만, 동시대 다른 여성 작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쾌활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음.

사실들
가난하지만 뼈대 있는 가문에서 태어남. 형제 자매들이 많아 외롭지 않은, 다분히 쾌활한 유년시절을 보냄.

어릴 때부터 똑똑하고 자기 주장 강하며 활달했음. 상당히 어린 나이 때부터 작품을 쓰기 시작했고, 글 쓰는 여성으로썬 드물게 사회적 교류도 상당히 잦았음.

남자에 대한 관심도 상당해 여러 남자와 교제를 했으나 평생 결혼하지 않았음.

파티에서 만난 사람들을 비판적이고 냉소적이며 비꼬는 시각으로 묘사한 것으로 유명. 특히 지적으로 좀 떨어지는 사람들을 혐오했음.

10살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죽을 때까지 계속 창작을 했으나 가족 중 그녀가 "작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음. 당시 여성 작가에 대한 차별적 시각 때문에 오스틴은 자신의 소설을 모두 무명으로 출간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집에서 글도 숨어서 썼음.

집의 거실에서 글을 쓰면서 일부터 대문에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했음. 누군가 들어오는 걸 미리 알아차려 재빨리 글 쓰는 것을 중단하고 다른 방으로 숨어 들기 위해서 였음.

오스틴의 이름이 세상이 알려진 것은 1814년 "오만과 편견"이 대히트를 기록하고 나서 였음.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에 등장시킨 "겉보기 무례하고 냉정한 남자가 알고 보니 현명하고 진실한 인간이었다"는 Mr. Darcy 모티브는 이후 수많은 로맨틱 소설, 영화, 드라마 시나리오의 주제가 될 정도로 제인 오스틴의 작품은 현대 대중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지 3년 뒤인 1817년, 알 수 없는 병으로 어머니와 동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


이상입니다... 나머진..역시..다음편에..;;
Posted by Young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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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너스로 위에 소개된 정약용이란 분을 소개합니다.

정약용(1762~1836. 호는 다산(茶山).)


사실들
남인의 가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천재적인 지적 능력을 발휘함. 4살 때 천자문을 깨쳤고, 7살 때 원근법을 소재로 한 시를 지음: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 / 가깝고 먼 곳이 같지 않네.” 그림에도 소질을 보였을 정도로 다재 다능했음.

조선 실학의 대부인 이익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음. 이익은 남인을 비롯한 조선 모든 실학자의 정신적 지주로 평생 벼슬을 하지 않으며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사도세자의 변이 일어나고 정조가 즉위한 어수선한 정국에 중앙 관직에 진출. 사도세자의 친자인 정조가 즉위했음에도 당시 조정은 여전히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간 노론이 정권을 쥐고 있었음. 정조는 정약용의 천재성을 일찍이 간파해 남인이었던 그를 학문적인 오른팔로 삼았음. 이때부터 정약용에 대한 노론 정권의 경계가 극에 달하기 시작.

임기응변 및 처세술이 남달랐음. 조정에서 자신의 소신에 어긋나지 않는 말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비위를 상하게 하지 않았고, 완벽한 논리와 변론으로 음해 받을 가능성을 최소화 했음. 이런 처세술은 그가 남인이라는 정치 태생적 한계와 천주교를 믿었다는 치명적인 약점에 불구하고 끝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해 줌.

1789년 화성(현재의 수원성)을 정조의 명을 받아 설계하기 시작. 현재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화성은 조선의 전통적인 축성법을 바탕으로 중국의 성제와 서양의 과학기술을 집대성해 지은 18세기 건축문화의 정수였음. (성 축조를 위해 기중기와 활자-도르래 등을 발명하기도 함.) 뿐만 아니라 정약용은 성을 건조하는데 드는 인력에 일정한 품삯을 제공해 현대적인 성과급 방식의 노동시장을 만들었으며, 계획적으로 개간된 농업시설 및 최초의 현대적인 상업지구를 기획, 성안에 기거하는 백성들이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이상 도시를 건설하였다.

정약용이 직접 설계하고 이용한 거중기. 정약용은 서학으로부터 기계학과 물리학을 이용, 실제 엄청난 무게의 돌을 들어올릴 수 있는 도르레를 만들어 냈다. 이 기계로 4만냥의 돈을 절약하는 효과를 거둠.

1799년 [전론]을 집필, 농업의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극소수의 지주들이 땅을 소유하고 그곳에서 농사 짓는 소작농들을 착취하는 시스템에서 벗어나, 국가가 농민들에게 직접 땅을 배분하고 능력에 따라 소득분배에 차등을 두는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한 것이 골자. 정약용은 이후에도 능력에 따라 이윤을 분배하는 자본주의적 시스템 도입을 여러 차례 주장함.

1794년 경기도 지역 암행어사로 임명돼 탐관오리의 패악을 남김없이 고발함. 그러나 이런 강직한 관직 활동은 노론 집권층의 원한을 사 후에 보복을 당하는 원인이 됨.

곡산의 목민관으로 부임했을 때, 세금 소요 사태를 일으킨 피폐한 농민들을 너그러이 돌려보내는 등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이 차별 받지 않도록 혁신적인 법 집행을 했을 뿐 아니라, 후대의 목민관이 이런 관행을 이어갈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까지 마련함. 정약용은 이후에도 정종의 신임을 받아 관리들의 부정을 감찰하고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해결해 주는 역할을 수행함.

정종가 승하한 후, 조선은 다시 학문, 문화, 경제, 정치적 암흑기로 빠져 듦. 정약용은 이때 자신의 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 지었음. 노자의 "망설이면서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 같이 주저하면서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자신을 지켜줄 주군이 없는 세상에 극도의 불안감을 표현함.

정조의 사후 노론 세력은 조정에서 남인 관료들을 뿌리 뽑기 위해 천주교를 악용함. 당시 재능 있는 남인들은 대부분 천주교 신자거나 천주교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었음. 노론의 잔혹한 탄압으로 조정의 남인들은 거의 전멸했고 정약용과 그의 주변인들도 차례로 제거됨. 정약용은 작은 형 정약종과 조카 사위 황사영이 천주교를 버리지 않은 죄로 모진 국문을 당하고 18년간 귀양을 가게 됨. (정약종과 황사영은 사형을 당했으나, 정약용은 과거 곡산 목민관 당시의 선행으로 죽음을 면하게 됨.)

귀양지인 전라도 강진에서 정약용은 실학문을 집대성하고 부국과 민생 안정을 위한 책을 냄. 귀양지에서 극도의 가난과 외로움, 마을 사람들의 천대를 불굴의 의지로 이겨내며 학문과 저술에 몰두, 아방강역고, 경세유표, 목민심서 등 수많은 저서를 집필함.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뒤 흠흠신서를 저술.

귀양지에서 아들들에게 편지를 보내 학문적 조언과 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쳤고, 이는 두 아들이 훌륭한 학자로 자라나는데 큰 도움이 됨.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자식 뿐이라는 생각에 편지에는 지나칠 정도로 엄하고 강압적인 내용이 많았음. 이들 편지에 드러난 정약용의 조급증과 아집, 몇몇 비상식적인 주장들은 정약용의 인간적인 면을 돌아보게 해줌.

정조시대 등용됐던 개혁 성향 관료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정약용이었음. 노론 세력은 정약용을 개혁파의 수장으로 여겨 그를 끝내 처단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했음. 귀양에서 풀린 뒤에도 정약용을 제거하려는 노론 세력의 수 차례 모함과 모략이 있었으나 모두 무위에 그침.

1836년 노환으로 별세.


어록
"우리나라 사람들은 걸핏하면 중국의 사실을 인용하는데 이 역시 비루한 일이다. 아무쪼록 삼국사기, 고려사 연려실기술과 동방의 다른 문자와 사실을 수집하고 그 지방을 고찰한 뒤에 시에 인용해야 후세에 전할 수 있는 좋은 시가 나올 것이며 세상에 명성을 떨칠 수 있다."

"임금의 정치가 퇴폐하면 백성이 곤궁하게 되는데, 그러면 나라가 가난하게 된다. 나라가 가난하면 부세의 징수가 가혹하게 되는데, 그러면 인심이 떠나가고 그러면 천명이 가버리게 되니 그런 까닭으로 시급한 것은 정치에 있다."

"너는 어째서 아비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느냐. 하물며 네가 아비의 책을 베끼고 읽지 않는데 누가 나의 책을 베끼고 읽겠느냐. 네가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폐족인 우리 가문을 누가 기억하겠느냐? 내 책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이 단지 사헌부의 계문과 옥안만 믿고 나를 평가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되면 나는 어떤 사람으로 취급 받겠느냐?"

- 귀양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

역시 다음편에서....^^
Posted by Young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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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너스로 최준이란 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역시 출저는 동일합니다.

최준(1884-1970, 호는 문파(汶坡).)
인간성
최준 가문의 최대 "가훈"은 "중용"이었음: "치우치지 말고, 성급하지 말고, 욕심 내지 않는다. 어느 것이든 완벽한 한 가지는 없으며, 좌우에 치우침이 없이 의롭게 산다." 이런 중용의 덕을 뼈에 심기 위한 듯, 최준의 조부의 호는 "대우(大愚: 크게 어리석음)"였으며, 친부의 호는 둔차(屯次: 재주가 둔해 으뜸가지 못함)였음.

중용과 의로움, 이는 최씨 가문의 재복을 3세기 동안 유지시켜준 가장 큰 원동력이었으며, 최준 일생의 좌우명이었음.

극도로 안정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이었으며, 과감한 결정이나 의사 표현을 하지 못했음. 자신의 이런 성격을 잘 알고 있어서 사업을 할 때면 다른 이에게 결정권을 넘기는 편이었으며, 스스로 완전히 적극적인 독립 운동에 나서지 않았음.

전통적으로 의로운 일에 강한 집착을 보였음. 가문이 화를 입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제에 협조하지도 않았으며(모호한 대답으로 완곡한 거부의 뜻을 표하는데 능했음), 평생 민족 교육을 위한 활동에 게을리하지 않았음.

권력이나 재물욕이 없으며 겸손했음. 베풀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자신이 설립한 교육 기관의 수장이 됐음에도 이내 일선에서 물러남.

사실들
최준은 경주 최 부잣집의 조선조 마지막 후손. 경주 최 부잣집은1600년대 초 임진왜란 당시의 명장 최진립 장군의 후손들로 수백만 평의 논밭을 가진 엄청난 부호였음. 조선조 수많은 전쟁과 당쟁, 민란을 거치면서도 이들이 쌓은 부와 지위가 300년간 10대를 이어 왔다는 점은 특이할만한 사실. 

1884년 태어난 최준은 어린 시절 신식 공부를 통해 개화기 지식인이 되고자 했으나 집안의 반대로 이른 나이에 결혼해 가업을 잇는다. 

독립 운동가 안희제와 박상진에게 크게 감화, 독립을 위해 교육 사업과 물산 장려 사업에 뛰어 들기로 결심. 1919년 백산 상회를 설립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당시 백산 상회는 부산 내 최대 사업체 중 하나였으며, 이익금의 대부분을 독립 운동 자금으로 환원함. 

지식인들의 권유로 당시 악화 일로에 있던 조선 문화재 유출을 막고자 경주 고적 보존회를 창립함. 경주 고적 보존회는 주변에 도굴된 모든 조선의 문화재를 사들여 굉장한 명성을 얻었으며, 이후 경주 박물관의 전신이 됨. 

일제의 방해 공작 및 지나친 독립 자금 조달로 백산 상회가 파산함. 사업이 어려운 와중에도 최준은 가문의 전통에 따라 흉년에 기아자 구휼을 위한 자선금을 내놓음. 

사업의 파산으로 300년째 내려오던 만석꾼의 지위는 땅에 떨어지고 최준의 가문은 역사상 유례 없던 빚 독촉에 시달림. 이후 최씨 가문의 재산권을 쥐게 된 식산 은행의 총재로부터 집요한 친일 요청을 받음. 일제는 최준의 빚을 일부 탕감해 주고 공직을 제안하는 등, 당시 민중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최씨 가문을 친일 계열로 흡수하려 했음. 최준은 이 모든 유혹을 뿌리침. (그러나 결국 최준의 동생 최윤이 대신 중추원 참의 자리를 수락함. 최윤은 멸문지화를 막기 위해 역적이 되기로 자청한 것으로 알려짐.) 

광복 후, 평생의 숙원이었던 교육 사업에 전력을 다함. 최준의 노력으로 대구 대학이 설립됐고, (대구 대학은 현재 영남 대학교의 전신) 이곳에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신라 때부터 내려온 국보급 도서들을 기증함. (최준이 기증한 도서는 현재 영남 대학교 중앙 도서관에 그의 호를 딴 문파 문고로 보존되고 있음.)  

죽음, 그 후
1970년 여든 일곱의 나이로 별세. 불행히도 그의 당시 저택에 불이나 문화재 급 자산이 훼손됨. (당시 최부잣집 저택은 이미 국가에 기증된 상태였음.)

그와 그의 조상들이 쌓은 부는 모두 국가를 위해 쓰여졌으며, 후손들은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짐.

2005년 경주시는 5억원의 예산을 들여 최부잣집 종택 사랑채를 원형 복원하기로 결정, "높은 도덕성으로 존경 받아온 최부잣집 유적지 일대를 복원해 관광명소로 활용하는 한편 고위층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일깨우는 교육의 장이 되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힘. 


이상입니다... 다음편에서 뵙죠...;;;

Posted by Young79